기원전 400년, 태양의 길, 용의 길
일 년에 각 한 번뿐인 춘분과 추분이 되면 태양은 미와산 정상에 떠올랐다가 니조산을 거쳐 오사카만으로 가라앉습니다.
태양의 궤도는 미와산과 니조산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태양의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어느덧 미와산의 오미와신사를 머리로, 니조산의 나가오신사를 꼬리로 삼는 "용의 길"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고대 왕권은 동서로 뻗은 이 길을 따르듯 미와산 기슭에서 미즈노에 이르는 지역에 거대한 전방후원분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고분이 늘어선 대왕묘 고분군을 건설했습니다. 즙석과 흙으로 만든 토용으로 장식하여
밝게 빛을 발하던 고분은 시간이 흐르며 초목으로 뒤덮여 산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되었습니다.
가도를 따라 늘어선 하쿠초료 고분을 뒤덮은 초목이 물로 가득 찬 해자에 비치는 아름다운 모습은 보는 이를 즐겁게 합니다.
다케노우치카이도, 요코오지(대도)는 바로 이곳에 건설되어, 지금까지 역사의 무대를 빠짐없이 지켜보았습니다.
미와산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해
613년, 국도의 탄생
다케노우치카이도, 요코오지(대도)는 613년에 외교의 출입구라 할 수 있는 나니와즈와 정치의 중심지였던
아스카, 오하리다궁을 연결하는 "대도(大道)"로서 건설되었으며, 총 길이 40km에 달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국도입니다.
대도는 나니와쿄 주작대로에서 직선으로 남하하는 나니와대도, 사카이에서 가와치를 지나는 다케노우치카이도와, 나라 분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요코오지에서 아스카에 이르는 상, 중, 하 세 개의 길로 구성됩니다.
그 후, 이 길을 기준으로 후지와라쿄도 건설되어, 지금도 동서남북을 가르는 지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가시하라시의 야기초에는 고대와 똑같은 폭 24m짜리 도로가 깔려 있어, 당시의 도로 폭이 얼마나 넓었는지를 실감케 합니다.
이 길을 통해 중국과 한반도에서 외교사절이 건너왔으며, 또한 견수사, 견당사를 통해 많은 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와 함께 불교가 전래되어 쇼토쿠 태자 등에 의해 수많은 불교 사원이 이 길을 따라 건립되었습니다.
야추지나 사이린지에서는 아스카 시대의 탑 유적과 묘단, 초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쇼토쿠 태자와 연관이 있는 시텐노지나 에후쿠지에서는 광대한 사역(寺域)에 장엄한 가람이 세워졌으며, 다이마데라에서는 일본에서 유일한 헤이안시대의 쌍탑식 가람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행사로는 시텐노지에서 열리는 성령회의 무악이나 다이마데라에서 열리는 네리쿠요에시키가 있어, 고대의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고대를 체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무대는 오사카와 나라의 경계에 있는 니조산을 넘어 다이시초에서 가쓰라기시로 가는 길입니다.
이와야 고개는 고동휘석안산암과 응회암의 산지로 유명하며, 일본에서는 희귀한 석굴사원인 로쿠탄지와 암굴이 숨어있습니다.
또한, 니조산 기슭의 다이시초는 비다쓰 천황, 요메이 천황, 스이코 천황, 고토쿠 천황, 그리고 쇼토쿠 태자를 모시는 마을로, 왕릉의 계곡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 지역은 예부터 가와치아스카, 지카쓰아스카라 불리기도 했는데, 야마토의 아스카 시대부터 아스카인이 왕래했던 길이기도 합니다.
국가로서의 일본은 이 대도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곳에서 그 역사적인 증거를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이마데라, 네리쿠요에시키
시나가다니 고분군(스이코 천황릉)
1573년, 경제의 길
꾸준히 명맥을 이어오던 대도는 시대가 바뀌고 중세로 접어들자 각 고장을 연결하는 물자 운송 가도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서쪽 끝의 사카이와 동쪽 끝의 이마이초는 중세 일본의 경제를 이끄는 양대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사카이는 무로마치 시대(1336년~1573년)에 포르투갈, 스페인, 명국을 대상으로 하는 무역 항만도시로서 경제력이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오사카만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이 고장은 나머지 세 면에 깊게 해자를 파고 자치도시 "사카이"를 건립했습니다.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를 비롯한 수많은 기독교 선교사가 사카이를 찾았으며, 루이스 프로이스는 사카이를 "일본의 베네치아"라며 극찬했습니다.
그 밖에 사카이는 금속 주조기술의 거점으로도 이름을 날렸습니다.
다케노우치카이도와 나카코야카이도가 교차하는 곳 부근(옛 가와치국 야카미군, 단난군)에는 "가와치 주물사"라 불리는 기술자가 있어, 가마쿠라시대에 도다이지의 대불 복원 작업 및 가마쿠라의 대불 주조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전국시대(1467년~1590년)부터 에도시대(1603년~1868년)까지는 사카이에서 조총이나 일본도 등을 생산하였으며, 현재는 주방용 칼을 비롯해 다양한 칼을 생산하는데, 세계적으로도 유명합니다. 지금도 조총 대장장이의 집과 에도시대의 상가가 남아 있어, 달군 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센노 리큐가 사카이에서 확산시킨 "차노유(다도)" 문화의 영향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어, 거리를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오래된 화과자점이 걷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한편 가도를 따라 일향종 혼간지가 세력을 넓힘에 따라 사찰 내 마을인 지나이마치가 여러 곳에 형성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마이초는 전국시대에 쇼넨지의 지나이마치가 되었고, 사카이와 마찬가지로 해자에 둘러싸인 자치도시가 건설되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에 맞서 저항을 이어나갔지만 이후 항복하였으며, 아케치 미쓰히데 및 사카이 거상들의 중재를 통해 노부나가와 화해한 뒤에는 자치권을 획득하여 야마토의 경제 중심지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렇게 사카이와 이마이는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교역 등을 통해 밀접하게 교류하였고, "바다에는 사카이, 육지에는 이마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전국시대부터 에도시대 초기까지 일본 경제를 구축하였습니다.
사카이시의 일본 전통 다도 체험
이마이초의 전통 거리
이마이초의 전통 거리
1603년, 신앙의 길
에도시대(1603년~1868년)에 이르러 가도는 오사카와 나라에서 이세로 이어지는 이세 신궁 참배를 뜻하는 "오카게마이리"의 길로 역할이 변화했습니다.
다이시에서 가쓰라기를 잇는 길에는 지금도 요소마다 참배용 신사나 이세 신궁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등롱, 이정표 등이 남아 있어, 이 길이 한때 여관과 찻집들로 활기를 띠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야기후다노쓰지와 이마이초는 지금도 에도시대의 거리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데, 약 500동의 전통건축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는 옛 민가를 활용한 숙박 시설은 물론 카페도 있어 여행객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에도시대 이후 다케노우치카이도는 서민들의 신앙길로서 번성하였고, 사람들의 다양한 사상을 옮겨주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다이시초의 등롱
2017년, 일본 유산등록
일찍이 쇼토쿠 태자는 수양제에게 "해가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가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라고 적은 국서를 오노노 이모코를 편에 보냈습니다.
아스카노미야코에서 나니와를 거쳐 견수사를 보내는 한편, 대륙에서 건너온 사절을 맞이하기도 했던 이 길은 생동하는 역사 속에서 다양한 "사람", "물자", "문화"가 오고 가며 변화하는 시대에 부응하면서 조금씩 그 역할을 달리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다케노우치카이도는 이 길을 따라 늘어선 역사유산을 통해 1,400년에 달하는 역사의 변화를 체험하고,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2017년 4월 28일에는 "1,400년에 달하는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가장 오래된 국도', 다케노우치카이도, 요코오지(대도)"라 하여, 일본 유산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일본 유산 포털 사이트:
https://japan-heritage.bunka.go.jp/en/stories/story044/
일본 유산 포털 사이트:
https://japan-heritage.bunka.go.jp/en/stories/story044/
니조산의 가라앉는 석양